[이진우 기자의 절벽가(絶壁歌)] 리콴유 같은 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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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사진출처=매경DB]

월드포스트의 편집국장인 나탄 가델스(Nathan Gardels)는 싱가포르의 국부(國父)인 리콴유를 세번이나 인터뷰를 했던 저명한 언론인이다. 세번에 걸친 인터뷰의 공통점은 공기가 얼음처럼 차가운 장소에서 리콴유와의 만남이 이뤄졌다는 점이다.

1999년 이뤄진 마지막 인터뷰는 추웠던 게 당연했다. 스위스 다보스에서 인터뷰가 이뤄졌으니. 그러나 앞선 두차례의 인터뷰는 싱가포르 대통령궁 인 이스타나에서 진행됐다. 그런데도 가델스는 공기가 얼음처럼 차가웠다고 기억한다. 에어컨을 엄청 세게 돌리고 있었으므로.

가델스는 인터뷰에서 리콴유에게 ‘싱가포르를 일으켜 세우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주춧돌이 뭐였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리콴유의 첫번째 답변은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이었다. 그는 “싱가포르는 일본과 같은 (단일민족의) 나라였다면 많은 문제들이 사라졌을 것”이라며 “싱가포르가 인도, 중국, 말레이시아에서 온 사람들로 구성됐기 때문에 ‘서로 간섭하지 않고 각자의 인생을 살아간다(live and let live)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라델스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것말고 싱가포르를 성공으로 이끈 요인은 뭐였나.” 그때 리콴유가 역사적인 답변을 내놓는다. 바로 에어컨이다. “에어컨은 싱가포르인에게 가장 중요한 발명이었다. 열대지역에서 개발이 가능하도록 함으로써 문명의 성격을 바꿔놓았다. 에어컨이 없었더라면 이른 아침이나 해질 무렵에만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싱가포르 총리가 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공무원들이 근무하는 건물들에 에어컨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공공부문의 효율성을 높이는 열쇠였다.”

지금도 싱가포르 건물들에는 리콴유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싱가포르의 연평균 최고기온은 31.4℃. 그러나 막상 싱가포르에 가보면 무덥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는다. 도시국가인 만큼 야외에서의 이동거리가 짧은데다, 일단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예외없이 에어컨이 ‘빵빵’하게 가동되기 때문이다.

언젠가 싱가포르 환경부 장관은 “에어컨 냉방이야말로 싱가포르 경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며 “에어컨 냉방 없었다면 아마도 많은 우리 근로자들이 최첨단 공장이 아니라, 열기와 습도를 피해 코코넛 나무 밑에 앉아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장황하게 리콴유의 ‘에어컨관(觀)’을 끄집어 낸 것은 그가 탁월한 행정가였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싶어서다. 싱가포르를 1인당 국민소득 5만달러의 부자나라로 만들수 있었던 데는 그의 행정능력이 큰 역할을 했다.

올여름 한국 국민들은 어마어마한 폭염사태를 겪어야 했다. 그런 와중에 유독 가정용에만 적용되고 있는 ‘전기료 누진제’ 파동이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다. 지난 8월 11일 박근혜 대통령과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와의 면담과정에서 과도한 가정용 전기료 누진제가 거론되면서 정부도 대책을 내놓은 상태다. 일단 올해 7~9월 전기료 경감대책을 내놓고, 새누리당과 함께 별도의 테스크포스를 마련해 근본적인 해법을 찾아보겠다는 것이다.

사실 가정용 전기료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이슈가 아니다. 오랫동안 억눌려왔던 문제였다. 다만 무려 11.7배에 이르는 누진구조가 올여름 폭염과 맞물려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터였다. 거기에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의 기자설명회 내용이 국민들의 짜증을 폭발시키는 ‘방아쇠’ 역할을 했다. 이 관계자는 “거실 스탠드형 에어컨은 하루 4시간 사용할 경우 월 요금이 10만원을 넘지 않는다”며 “스탠드형과 벽걸이형 에어컨을 동시에 12시간 동안 가동하지 않는다면 요금 폭탄이라는 표현은 과장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특히 “전기요금 누진제를 개편할 경우, 전기소비량이 적은 가구의 부담만 늘리는 효과를 발생 할 수 있는데 이는 1%를 위한 부자 감세와 같다”며 “누진제 개편에 대해 전혀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가 국민적인 공분을 샀다.

해당 관계자 입장에서는 충분히 합리적인 설명이었을 것이다. 사실관계(fact)에 있어서 잘못된 부분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이 소식을 전해들은 필자는 크게 세가지 생각이 들었다.

첫째, 리콴유가 에어컨에 대해 가졌던 종합적인 사고방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한국 공무원들의 후진성이다. 에어컨을 충분히 가동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다른 편익들을 모조리 무시하고, 전기요금과 전력수급의 관점에서만 사안을 바라다보니 엉뚱한 논리가 나올수 밖에 없다. 제대로 된 고위 공무원이라면 리콴유처럼, 예컨대 다문화주의와 에어컨의 효용을 동시에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한국 공무원들의 말 속에는 오로지 ‘부처 논리’만 있을 뿐 사회적, 문화적 고려가 없다. 그나마 ‘부처 논리’라는 것도 관련업계에서나 통용될 만한 지엽말단적인 수준인 경우가 많다. 숲은 보지 못하고 그 속에 있는 나무 한그루 한그루에만 신경을 쓰는 꼴이다.

두번째로 든 생각은 한국 공무원들로 하여금 이런 사고방식을 갖도록 만든 정부 조직구조다. 기본적으로 한국의 정부조직은 산업별로 구분돼있다. 필연적으로 자기부처가 담당한 산업의 이해관계 중심으로 정책이 짜여지고 집행되고 평가받는다. 국정 전반을 아우르는 크고 긴 안목을 갖기 어렵다. 전부는 아니겠지만 심한 경우에는 담당산업을 챙기느라 전체 국익을 놓치는 경우도 생기게 된다.

마지막 세번째로 든 생각은 세종시로 정부 중앙부처가 내려간 후 점점 심해지는 일명 ‘세종시병(病)’이다. 이번 전기료 발언처럼 일반 국민들의 생활과 동떨어진 뜬금없는 반응들이 공직자들로부터 자꾸 나오고 있다. 집에서 구워먹는 고등어를 미세먼지 주범으로 지목한다거나, 건강한 사람한테 미세먼지는 큰 문제가 아니라거나, 비록 취중발언이긴 하지만 ‘민중은 개 돼지’라는 식의 언급이 이런 범주에 포함된다.

이러한 세가지 생각 모두 한국 행정부, 한국 공무원의 경쟁력과 관련된 얘기다. 과거 고도성장 시절 행정부와 관료는 나라를 이끌어가는 핵심세력이었다. 지금은 그 역할을 기업을 비롯한 민간부문이 맡고 있다. 나라가 발전한데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경향에도 정도가 있기 마련이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적 난제의 해결사는 공무원 조직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직면한 각종 골칫거리들은 공무원이 주도해 풀어나갈수 밖에 없다. 그런데 최근에는 공직부문의 뒤처짐이 너무 심한 것 아니냐는 의문이 든다. 공무원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 자체가 고장난 것 아니냐는 의심까지 든다. 공무원이 예전처럼 국가발전의 견인차 역할은 못하더라도, 걸림돌이 되어선 곤란하지 않은가. 요즘 대한민국 공무원들 정말 걱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