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최상위 엘리트 선발 투자유치 전문가 육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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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서 상위 5% 뽑아 전 세계 명문학교로 유학 보내

인도네시아 자원‧노동력 풍부

발전 가능성 무궁무진한 ‘보석’

▲ 공사가 한창인 싱가포르 산토샤 섬, 이 곳에 유니버설 스튜디오와 카지노가 들어선다

[글로벌이코노믹 안도현 데카트롱 동남아 개발총괄 이사] 대학원에 입학하고 다시 학생이 되어 맞이한 여름방학에 해외인턴을 할 기회가 있었다. ‘투자유치전문가 양성’을 위해 만든 MBA과정이라서 당시 산업자원부와 코트라(KOTRA)가 특별히 협약을 체결하여 코트라 전 세계 지점에 인턴이 가능하였다. 유럽 및 북미는 선호도가 높아 빠르게 신청을 했고 경쟁이 적은 텔아비브와 싱가포르 무역관을 신청했다. 좀 더 안전한 싱가포르 무역관에서 근무하게 되었고 틈틈이 주말에는 인도네시아를 다녀오기도 하고, 2012년 런던올림픽 개최지 선정을 위한 IOC총회에 참가하여 프랑스 파리를 응원하기도 했다.

KOTRA 싱가포르 무역관에 근무하면서, 싱가포르 시장과 싱가포르에 대해 조사하는 기회가 있었는데 싱가포르 투자청(EDB)와 화교네트워크에 대해서 깊이 조사했다.

싱가포르 정부는 전체 학년별 학생들에 대한 석차를 평가하고, 그중 상위 5% 이내의 학생들을 선발하여 전 세계의 명문학교에 전액 장학생으로 교육을 시키고 해외 인턴 십 등을 통해 투자유치를 위한 전문가로 양성된다. 장학금, 생활비, 연간 도서구입비, 초기정착비용 등이 지급되며 필수로 외국어를 이수해야 한다. 그리고는 가장 중요한 정부의 요직에서 의무적으로 5~6년 이상을 근무해야만 한다. 공무원 급여가 외국계보다 높은 수준이니 싱가포르의 가장 뛰어난 엘리트들은 자국의 경제발전을 위한 투자유치 및 경제전문가로서 국제마인드의 관료가 되고 있었다.

30살이 넘은 국장, 40대의 장차관들이 넘치며 능숙한 외국어 실력과 현지에서 살면서 유학하고 외국회사에서 근무한 공무원들이 외국기업의 본사유치를 위해서 협상을 하고 있었다. 외국 본사가 계속 밀려들고 있었고 외국인들이 좋아하는 도시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2018년을 위한 전략이 치밀했고 미래를 향한 국가와 공무원의 노력이 부럽고 나 역시 ‘투자유치 전문가’로서 한국을 성장시킬 꿈을 갖게 되었다.

투명하고 깨끗하다고 생각되는 싱가포르 역시 도시 뒷골목에는 지저분하고 음침한 곳이 있고, 유흥과 향락을 위해 마카오, 홍콩, 인도네시아로 여행을 떠나는 싱가포르인들도 있었다. 단 하나의 방송과 신문이 통제된 사회의 단면만을 비추었고 정부 비판이나 총리 가문의 재산 등은 철저한 비밀로 통제되고 있었다. 깨끗하고 세련되고 화려한 벤츠 같은 싱가포르는 유지비가 많이 들어 저렴한 국수를 먹으면서 운전하는 운전기사 같은 국민들이 엘리트들을 모시고 있는 느낌이었다.

▲ 싱가포르에는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도시가 작아 빠른 시간에 도시를 구경했고, 주말마다 틈틈이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빈탐과 바탐 여행을 떠났다. 인도네시아 항공사인 ‘가루다항공’에서 특판가로 저렴하게 판매하는 자카르타 항공권을 구매했다.

싱가포르 공항에서 2박 3일 일정으로 자카르타로 가기 직전 나는 싱가포르 현금자동입출금기(ATM)에 카드를 넣었다. 카드를 삽입하라는 메시지가 나오기 전에 카드를 넣던 한국식 습관으로 하다 보니 오류가 생겨 카드가 반환되지 않고 주말이라서 아무도 서비스센터에서 지원하지 못했다. 2박 3일이 지나고 월요일에 다시 와야 하고, 나의 저가 티켓은 사용할 수가 없게 된다. 나에겐 현금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일단 자카르타로 갔다.

자카르타에서 비자를 발급받고 남은 돈은 10달러가 안 되었다. 버스도 탈 수가 없고, 숙소에서 잘 수도 없다. 식사도 불가능할 것이고 다시 인도 델리 역에서처럼 공항에서 이틀을 버티다가 싱가포르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오늘 어디서 자고 있을지 궁금하다. 내가 어떻게 이 상황을 해결하는지 궁금하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는 10달러로 3일을 버티기라는 미션을 나에게 주었다.
‘강원도 무전횡단도 했고 미국 횡단도 했다. 인도 히말라야도 갔던 내가 아닌가?
나에겐 생존 감각이 있다. 절대로 죽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오늘밤에 어디서 자고 있을지가 궁금할 뿐이다. ‘

버스에 올라탔지만 다행히 버스비를 요구하지 않았다. 감각적으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도착을 했고 지나가는 외국인들이 향하는 곳을 향해 계속 걸어갔다. 몇 군데 방문한 호텔에서 나중에 돈을 보내겠다는 터무니없는 외국인을 계속 문전박대하고 결국 인도네시아 잘란 작사(Jalan Jaksa)라는 구역에 도착을 했다.
신기하게도 2달러짜리 도미토리 형 숙소가 있었고 비상금으로 5달러를 남긴 채 나는 누군가 잠시 비워둔 침대에서 잠을 잘 수 있었다. 저녁 늦은 시간이 되자, 여기저기 분주하게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남녀가 구분이 없는 숙소의 침대에서 지저분해 보이는 사람들이 짧은 치마와 화장으로 세련된 인도네시아의 영어 잘하는 여인들로 변하고 있었다.

이들은 돈이 없어 나갈 수 없다는 나에게 생수를 가져다주고, 한 인도네시아 여자는 자기의 남자친구 만나는 곳에 같이 가자고 나를 초청했다. 그녀의 남자친구는 역시 나이든 유럽 네덜란드와 독일의 관광객과 사업가들로서 현지의 유흥을 위한 여자를 찾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반면, 밤의 요정이 되어 카페에서 외국인 남자들의 친구가 되어 돈을 벌거나 인도네시아를 벗어날 생각을 하는 여인들은 잘난(잘란) 작사에 오기 전에는 인도네시아 정부의 공무원, 영어교사, 회사원 등의 직업이 있었다고 했다.

▲ 인도네시아 청년이 바나나를 구워서 팔고 있다

세련된 영어와 다양한 상식의 대화로 난 이들이 높은 교육수준의 배경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들에게 가장 큰 목표는 외국인 남자친구와 결혼해서 인도네시아를 벗어나는 것이라고 했다. 동남아시아 여성에 대한 편견은 결국 나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고 누구나 치열하게 열심히 살아간다는 생각을 했다.

인도네시아에서 외국인은 행복해보였으며, 현지인들은 뭔가 미소를 잃은 것처럼 보였다. 밝은 미소의 태국과 말레이시아에 비하면 인도네시아인의 미소는 뭔가 깊은 신비가 가득해 보였다.

다음날 우연히 인도네시아 박물관에서 만난 한국인 학생을 통해 경비를 빌리게 되었고, 그와 같이 주요 지역을 방문하게 되었다. 찬란했던 1970년대 인도네시아의 활약과 아시아를 대표하던 화려한 자카르타의 과거 사진에 놀라게 되었다. 네덜란드의 오랜 식민통치로 시달리던 인도네시아는 독립을 통해 아시아의 중심으로 성장했으나, 정치불안으로 오랜 불황을 겪게 되었다. 인구와 자원,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는 인도네시아에는 다양한 고대의 유인원 유골처럼 숨겨진 가능성이 많아 보였다.

다음날 한국 학생의 도움으로 공항까지 무사히 도착했고, 싱가포르에 돌아오게 되었다. 며칠 뒤, 나는 동남아시아 지도를 놓고 싱가포르에서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원을 그렸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부르나이, 필리핀, 홍콩, 마카오, 광저우,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태국, 미얀마, 다시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의 13개국을 방문하고 귀환하는 일정을 세웠다.

기간은 단 30일뿐이다. 나는 이런 빠른 여행의 배낭여행객을 위한 론리플래닛(Lonely Planet) 동남아시아 편을 구입했고, 말레이시아 사라왁주 코칭으로 떠나는 티켓을 구매했다. 이후 나는 동남아시아의 모든 종류의 이동수단을 타면서 13개국 방문을 30일 만에 마치게 된다.

[출처: 글로벌이코노믹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