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이젠 런던·뉴욕과 어깨 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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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마리나만(灣) 끝쪽에 자리한 순백색의 머라이언상(Merlion statue, 머리는 사자, 몸은 물고기인 상). 싱가포르를 상징하는 이 사자상을 호위하듯 그 뒤를 초고층빌딩들이 빼곡히 에워싸고 있다. HSBC, 씨티, DBS 등 글로벌 금융회사들이 돈으로 빚어낸 마천루는 자연의 위용을 압도한다. 마리나베이를 중심으로 싱가포르 강가를 따라 펼쳐진 금융 중심가는 싱가포르의 최고 관광명소가 됐다.

싱가포르는 홍콩과 함께 아시아의 양대 금융허브로 꼽힌다. 금융서비스업은 싱가포르 국내총생산(GDP)의 약 12%를 차지하는 주력산업이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거센 파도 앞에서도 싱가포르는 진격을 멈추지 않았다. 이제 아시아시장은 좁게 느껴지는 형국이다. 영국 런던, 미국 뉴욕과 어깨를 겨루는 글로벌 금융허브로서 위상을 높이고 있다.
 


 

◆ 투명하고 합리적 규제로 금융산업 성공

싱가포르는 우리나라, 홍콩, 대만과 더불어 한때 ‘아시아의 네마리 용’으로 불렸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아직 2만4000달러(2013년 기준)에 머물러 있는 사이 싱가포르는 부자나라로 우뚝 섰다. 싱가포르의 1인당 국민소득은 5만달러를 넘는다.

무엇이 싱가포르와 한국의 격차를 이렇게 벌어지게 했을까. 지피지기 차원에서 먼저 싱가포르의 민낯을 보자. 

- 인구 531만명 : 대한민국 인구(약 5000만명)의 대략 10분의 1 수준이다. 
- 면적 712㎢ : 서울시의 약 1.18배. 우스갯소리로 싱가포르에서 40분만 자동차로 직진하면 바다에 빠질 것이라는 말이 있다. 
- 부존자원 : 대한민국 뺨치는 자원빈국. 척박한 토양으로 농사조차 짓기 어렵고 물도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주변국에서 수입한다.

그렇다면 사람도, 땅도, 자원도 부족한 작은 나라가 어떻게 오늘날의 초일류국가가 됐을까. 개발의 역사 또한 ‘한강의 기적’을 기죽이도록 극적이다.

싱가포르는 19세기 초만 해도 작은 어촌마을에 불과했다. 1918년 영국의 식민지가 되지만 이를 계기로 무역의 중심지로 성장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그러나 1942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잔혹한 일제점령기를 겪었다. 이때 싱가포르인의 최소 5~10%가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어 다시 영국의 식민지로 돌아갔다가 말레이시아연방을 거쳐 1965년 8월 독립했다.

하지만 당시 싱가포르에는 독립 만세의 함성이 아닌 절망과 한숨이 가득했다. 가난한 흥부(?)가 엄동설한에 놀부 형의 집에서 쫓겨난 형국이었기 때문. 싱가포르의 당시 1인당 GDP(국내총생산)는 400달러 수준. 동남아시아 국가 중에서도 소문난 빈국이었다.

이랬던 싱가포르가 반세기도 채 안돼 환골탈태한 데는 무역 및 금융 등의 전략산업 육성이 주효했다. 싱가포르는 세계에서 가장 투명하고 친기업적인 시스템을 구축한 나라로 알려져있다. 아시아 태평양지역에서 가장 낮은 수준의 법인세율(17%)을 자랑하며 전세계 60여개국과 이중과세 방지협정(double tax agreement)을 맺었다.

이와 같은 친기업 문화를 근간으로 1960년대부터 아시아의 금융허브로 발돋움하기 위해 세계 굴지의 금융회사와 기업을 유치, 금융생태계를 조성했다. 지난해 중순 기준 싱가포르에서 영업하는 은행 122곳 중 외국계 은행은 무려 116개나 된다. 이외에도 자산운용사, 보험사 등 내노라 하는 글로벌 금융사들이 밀집해있다.

짧은 시간에 금융의 중심지로 급성장한 싱가포르의 발전에는 선진화된 금융시스템이 큰 몫을 했다. 싱가포르의 중앙은행으로 금융기관을 규제하고 감독하는 권한을 가진 싱가포르통화청(MAS)은 규제를 최소화하고 대외 개방도를 높였다.

이에 대해 싱가포르 소재 유럽계은행의 관계자는 “한국의 은행은 금융당국이 감사를 실시한다고 하면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싱가포르 금융회사들은 MAS를 존경할뿐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싱가포르 MAS와 금융사는 긴밀히 소통하면서 서로에 대한 불신을 줄였다는 설명이다.

그는 한국이 싱가포르처럼 금융강국이 되기 위해선 복잡다단한 규제부터 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관계자는 “한국은 금융규제가 많을 뿐 아니라 불투명하다”며 “금융사들이 규제를 안 지키려는 게 아니라 애매모호해서 못 지킬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 세계 2위 위안화 허브, 2020년 자산관리 1위 전망
 
금융을 필두로 숨 가쁘게 질주해온 싱가포르의 전진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아니 홍콩이 최근 정치 불안이라는 악재로 흔들리는 사이 싱가포르의 발걸음은 더 빨라지고 있다. 실제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에 따르면 올 1분기(1∼3월) 싱가포르에서 거래된 역외 위안화 거래량은 지난해 동기 대비 375%나 증가했다.

싱가포르와 중국은 지난해 2월 위안화 청산은행을 ICBC 싱가포르로 지정했다. 그로부터 불과 1년. 싱가포르는 금융강국의 명성에 걸맞게 단숨에 세계 2위의 위안화허브로 올라섰다. 지난 2분기까지 발행된 위안화 채권규모는 25억위안(한화 약 4300억원)에 이른다.

이로써 싱가포르는 유럽지역 최대 위안화 거래 허브였던 런던을 따돌리고 본격적인 홍콩 추격에 나섰다. 지난 9월에는 역대 최대 규모인 40억위안(한화 약 6800억원) 상당의 ‘라이언시티채권(Lion citi bond)’을 발행했다.

싱가포르 현지은행의 한 관계자는 “홍콩에 딤섬본드가 있다면 싱가포르에는 라이언씨티본드가 있다”며 “싱가포르는 오일허브이면서 중계무역항의 강점이 있어 위안화 거점으로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을 갖췄다”고 전했다.

투명한 금융환경과 합리적 조세정책으로 싱가포르는 스위스를 위협하는 세계 프라이빗뱅킹(PB) 중심지로도 괄목할 만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자산관리업체 웰스인사이트는 싱가포르가 관리자산 규모에서 2020년까지 스위스를 제치고 최대시장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싱가포르 금융인이 보는 싱가포르 금융산업의 경쟁력
미니 인터뷰 / 어빈 셔 DBS 시니어 이코노미스트

– 아시아 금융허브로서 홍콩과 선두다툼하는 싱가포르의 가장 주목할 경쟁력은 무엇인가.

“금융허브에는 비즈니스 기반이 요구된다. 지금까지 홍콩은 중국 금융시장의 교두보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근래에는 중국이 문호개방에 따라 상하이, 선전 등 자국의 금융시장을 더 발달시키려하고 있다. 이에 반해 싱가포르는 아시아의 교두보다.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최근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아시아 금융시장을 기반으로 한다. 싱가포르가 기존에는 금융허브로서 홍콩에 다소 뒤졌지만 지금은 대등하거나 앞서나가는 단계라고 본다.”

– 글로벌 금융위기로 전세계 금융산업이 크게 요동쳤음에도 싱가포르의 금융부문은 상대적으로 고성장을 지속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든 요인은?

“위기일수록 세계 각국의 돈은 안전한 곳으로 모일 수밖에 없다. 싱가포르의 신용등급은 트리플에이(AAA)다. 지난 90년대 아시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싱가포르정부가 깨달은 게 있다. 금융회사의 합병 등을 통해 자산규모를 키우고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싱가포르의 은행은 DBS, OCBC, UOB의 3강 체제다. 이 은행들이 태국, 인도네시아 등 주변국가에 진출해 영역을 넓히고 있다. 2000년대 초반 중국의 성장을 예견했기에 이에 맞춘 인프라도 구축했다.”

– 싱가포르 금융산업의 미래를 어떻게 보나. 최근 고성장의 피로에 따른 ‘중년의 위기 현상’이 나타난다는 지적도 있는데.

“위기와 기회는 같이 오는 법이다. 근래 전통적인 은행산업은 IT 등의 결제기능 강화로 축소되는 면이 있다. 그러나 역으로 은행도 다른 사업기회를 가질 것으로 생각한다. 이를테면 계좌번호가 없어도 전화번호만으로 이체하는 디지털뱅킹, 부동산 애플리케이션에서 모기지론까지 바로 연결되는 시스템으로 채널과 마케팅을 다양화하고 있다. 현재 싱가포르경제에서 금융서비스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GDP 기준으로 약 12%다. 앞으로 18%까지 더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TIP] 파인 시티의 두 얼굴

싱가포르를 떠올릴 때 연상되는 이미지는 깨끗함이다. 길거리에 휴지나 담배꽁초 하나 발견하기 어려운 나라로 익히 알려져 있다. 따라서 깨끗한 도시라는 의미의 파인 시티(Fine City)로 불린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다른 속뜻이 있다. Fine은 명사로는 벌금의 뜻을 지닌다. 즉 ‘벌금의 도시’라는 의미다.

싱가포르의 경우 거리에 쓰레기를 버리거나 침을 뱉거나 무단횡단을 하면 무거운 벌금을 물린다. 버스·지하철에서 음료나 음식물을 먹으면 500싱가포르달러(한화 42만원 상당), 침을 뱉으면 500∼2000싱가포르달러의 벌금을 내야 한다. 심지어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고 물을 내리지 않거나 물을 낭비하는 행위에도 벌금이 부과된다.

또한 싱가포르는 세계에서 치안이 가장 발달한 나라로도 꼽힌다. ‘여성이 홀로 새벽에 돌아다녀도 안전한 나라’로 일컬어진다. 싱가포르의 엄격한 법 집행은 외국인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공공기물을 파손했다는 죄목으로 미국인 소년에게 태형(곤장)을 내리거나 마약을 소지한 호주 청년을 전세계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사형 집행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깨끗하고 질서 있는 환경조성은 세계 자본의 유치에도 큰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 <싱가포르에 길을 묻다>의 저자인 강승문씨는 싱가포르 체류경험을 담은 저서를 통해 “깔끔하고 단정한 도시는 투자를 위해 싱가포르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할 수 있는 유능한 사람들(싱가포르정부와 국민)임을 믿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풀이했다. 

 

<출처: MoneyWee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