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 잃는 경제지표…전쟁·환경파괴도 경제활동?(

57

“GDP가 증가하면 우리는 더 행복해질까?”

한 국가의 경제 규모를 보여주는 국내총생산(GDP)은 ‘경제지표의 왕’으로 불린다. GDP는 국가의 부(富)와 명성을 나타내는 척도이며 ‘선진국 클럽’에 가입하기 위한 주요 잣대다. 일본을 추월한 중국의 GDP가 세계 1위 미국을 언제 따라잡을 지는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다. 미국과 유럽이 글로벌 금융위기를 탈출했는지 여부도, 중국발 경제위기설이 확산되는지 여부를 판가름 하는 것도 GDP 변화, 즉 한 국가의 경제 성장률이다. 이처럼 국력 비교에서부터 국가의 정책 결정, 심지어 정권 교체에 이르기까지 GDP의 손이 미치지 않은 곳은 없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GDP가 국가와 세계 경제의 시대적 변화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GDP는 한 국가가 일정기간 동안 생산해 낸 재화와 서비스의 총합이다. GDP는 세계 경제가 대공황을 극복하고 비약적으로 성장하면서 ‘생산’이 강조되기 시작했던 지난 1930~1940년대 처음 등장했다.

이후 80여년간 세계 경제의 축은 제조업에서 서비스로 이동했고 컴퓨터ㆍ인터넷이 중심인 디지털 사회를 넘어서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로봇이 키워드인 제4차 산업혁명을 맞는 등 큰 변화를 겪고 있다. 단순히 최종 재화의 총합만으로는 국가 경제를 진단할 수 있는 시대가 지났다는 뜻이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1970년대에 비해 국민들이 즐길 수 있는 TV 채널 숫자는 크게 늘었고 진통제의 종류도 더 많아졌지만 현재의 GDP는 이 같은 소비자들의 기호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밖에 우버ㆍ에어비앤비 등으로 대표되는 공유경제와 트위터ㆍ페이스북ㆍ구글 등이 제공하는 온라인 커뮤니케이션, 급성장하고 있는 전자상거래 시장, 무료백과사전 위키피디아가 제공하는 정보, 가사ㆍ육아와 같은 무보수 노동 등 지금의 사회를 구성하는 중요한 가치들도 GDP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심지어 환경파괴나 전쟁 같은 행위가 경제활동으로 분류돼 GDP가 비약적으로 늘어나는 상황도 있다.

.

약간의 산정방법 변경으로 한 국가의 GDP가 달라지는 일도 발생한다. 나이지리아의 경우 과거에 없었던 통신ㆍ정보기술(IT)ㆍ음악ㆍ전자상거래 등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지난 2014년에 GDP 산정 방법을 수정했다. 이후 나이지리아의 GDP는 89%나 증가하면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제치고 아프리카 순위 1위에 올랐다. 유럽연합(EU)은 지난 2013년 일부 기호약물(recreational drugs)과 매춘 등도 GDP 산정시 포함하기로 했고 이는 영국의 연간 GDP를 0.7% 늘리는데 기여했다. 국가별로 GDP 수정치나 확정치가 첫 발표 때와 큰 차이가 나는 상황도 비일비재하다.

선진국을 중심으로 경제가 성숙기를 거치면서 그 속도는 더디지만 GDP의 총량은 여전히 대부분의 국가에서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삶의 질과 번영, 국민들의 행복도는 오히려 20~30년 전보다 더 낮아졌다는 비판이 높다. 최근 소장파 경제학자들이 중심이 돼 단순한 통계 항목의 수정을 넘어서서 국가의 번영과 국민들의 삶의 질 변화를 측정할 수 있도록 GDP를 근본적으로 개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다.

2001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클리츠 미국 컬럼비아대 석좌교수는 GDP 수정론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다. 그는 최근 미 시사월간지 ‘더 아틀랜틱’과의 회견에서 “생산 총합인 GDP는 정작 그렇게 생산한 것들이 누구의 주머니로 어떻게 들어가는지를 보여주는 데 실패하고 있다”면서 “91%의 생산물이 상위 1%에게 돌아가고 나머지 99%의 삶은 GDP가 늘어나기 전보다 더 피폐해졌지만 GDP를 통한 경제 측정 방식은 이런 상황이 전혀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스티글리츠 교수는 다른 경제학자들과 연구팀을 꾸려 지난 2011년 ‘GDP는 틀렸다’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저자들은 계량 시스템의 중심이 경제적 생산에서 생산되는 재화의 질적 변화로 진화해야 할 시점에 놓였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질적인 변화는 사람들의 실질 소득과 소비, 그리고 행복을 결정하는 주요 요소이며 단순한 경제 덩치를 넘어서 국가의 경제 발전과 사회적 다양성까지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이코노미스트는 가사일과 같은 무보수 일과 서비스의 질 개선, 수명 증가, 소득 계층별 다른 소비패턴, 기술발전 등 다양한 경제적 요인들을 반영하는 ‘GDP 플러스’라는 개념 도입을 제안했다. 이와 함께 변화하는 사회적 가치를 담을 수 있도록 최소 10년마다 한번씩은 지표를 손봐야 하며 각 국가 통계 기관들의 문제의식 공유, 협력 등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경제 지표의 산정방식이 현재 상황을 반영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판단해 아예 새로운 지표를 도입하는 나라도 있다. 일본의 경우다.

최근 일본은행(BOJ)은 개인 소비 동향을 보다 정확하게 집계하기 위해 이달부터 ‘소비활동지수’를 새롭게 공표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기존에 일본 총무성이 매월 발표하는 ‘가계조사’가 정확한 소비 동향을 파악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데 따른 것이다.

새롭게 공표되는 소비활동지수는 식료품과 자동차 등 42개 품목의 상품과 서비스의 판매 상황을 종합해 만들어진다. 스마트폰, 통신료와 의료 등 공급 측면의 통계를 이용해 일본 GDP(국내총생산)의 60% 비중을 차지하는 개인의 소비 상황을 좀 더 면밀히 파악할 수 있을 기대된다.

소비활동 지수는 2010년 소비를 100으로 두고 명목가격과 물가 상승의 영향을 제외한 실질가격을 반영해 작성된다. 공급측면의 통계를 이용하는 만큼 방일 관광객의 소비도 지수에 포함된다. BOJ는 GDP 기반 소비의 정의에 부합되도록 방일관광객의 소비를 제외하고 해외로 나간 일본 관광객들의 소비를 포함한 ‘실질 소비 활동 플러스’도 공개할 예정이다.

BOJ는 앞으로 GDP의 속보치와 확보치를 계산하고 향후 경기 판단이나 정책 운영에 소비활동지수를 사용할 방침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새로운 물가지표의 도입에 의구심을 나타내는 시각도 있다. 물가상승률 2%를 목표로 내걸고 있는 BOJ가 유리한 방향으로 소비지표를 산정하려 한다는 지적이다.

일본 총무성의 가계조사에 따르면 2010~2014년 실질 소비지출은 0.2% 감소했지만 GDP 확보값을 기준으로 실질적인 개인 소비를 추산해보면 같은 기간 2.6% 상승한 것으로 나타난다. 또 아직 공개되지 않은 2015년 GDP 확정치가 GDP 속보치에 비해 개인소비는 1% 정도 높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BOJ가 지속적으로 소비가 회복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BOJ는 앞서 2014년부터 신선식품(주류 제외) 및 에너지를 제외한 물가지수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변동성이 큰 유가와 신선식품 가격을 덜어내 물가지수의 불확실성을 덜어낸다는 취지에서였지만 물가 하락세를 부각시키지 않기 위한 꼼수라는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소비지표의 산정 방식에 대한 논란은 일본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한국에서도 소비자물가지수(CPI)가 실질 소비 현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어 지난 1월 통계청이 전면 개편한다고 공표한 바 있다. 통계청은 조사품목을 재조정하고 월세 등 체감도 높은 품목의 가중치를 재조정하는 한편 온라인 물가지수, 신혼부부 통계 등 다양한 물가지수를 새롭게 도입한다는 방침이다.

 

[출처: 아시아경제]